‘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시인의 시집(詩集) 이름이다.
술 떨어지고, 안주 떨어져 하나, 둘 일어나서 나가면 잔치는 끝난 것이다. 서른이라고 하는 나이의 한 세대가 그렇게 끝나는 것인가?
장애인의 운동의 역사가 약 30년 정도로 생각 한다면 이제 ‘장애인의 잔치는 끝났다.
이번 20대 총선에서 전국 장애인단체와 장애인들을 대표할 장애인들의 공천이 각 당 모두 배제된 것이다. 이는 17대, 18대, 19대에서 장애인들에게 배려(?)됐던 제도권 진입이 20대에서도 당연이 있을 것으로 기대 했으나 모두 배제된 것이 충격이라면 충격이 되었다.
내 것을 빼앗긴 이 기분(氣分), 많은 장애인들의 생각인 것 같다. 그러면 왜 일까? 결론은 메리트(merit)가 없다는 것이다.
장애인들을 공천해서 소수자들을 배려한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상품가치가 없다고 판단 한 것이다. 장애인으로서 서글픈 일이지만 장애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진이 필요 했던 것이다.
그들을 공천함으로써 보여 지는 그 모습이 약자를 배려하는 착한(?) 정당이라는,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고자 했다면 너무 많이 나간 것일까? 이런 광경이 친숙(親熟)해져 더 이상 감동을 주지 않다는 것 일게다. 더 새롭고 신선한 감동거리를 찾을 것이다. 이렇게 20대 총선의 잔치는 끝났다. 이대로라면 차기에도 잔치는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인가? 아니 몇몇 장애인단체가 시위를 하고 항의하지만 결과는 ‘글쎄’이다. 이 방법도 그들은 이미 익숙해져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더 강력한 항의? 이것도 글쎄 이다. 자!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원인을 파악해 보고 처방을 생각해 보자.
우선 17, 18, 19대에 의정활동을 했던 장애인 당사자들의 의정활동이 비장애 국회의원들에 비해 저조했는가? 18대 의정활동을 했던 필자는 겨우 낙제를 면했다고 생각하면서 나 스스로도 반성한다.
제도권에 있던 당사자들은 좀 더 많은 부분을 할애 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것이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설득과 협상이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이 부족했음을 아쉬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 쪽의 생각은 별로였던 것 같다(?). 이것이 주원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장애인과 장애인단체의 목소리가 일관되지 않았고 사분오열이 되어 신뢰를 잃었다.
19대 총선에서 장총과 장총련이 주축이 되어 총선연대를 꾸렸지만 심판을 보던 사람들이 선발된 선수를 재끼고 몰래 대표선수로 등록해 룰을 흐리게 한 것이 분열의 시작이라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후 저 마다 단독 플레이를 하여 도전하게 되었지만 전패의 오늘을 맞았다. 전술전략 모두 부족이었다. 이당 저당 다니며 이런 요구, 저런 요구만을 하는 한 더 발전되긴 어렵다.
정치는 협상이다.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 내가 줄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명분을 대동하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 방법을 바꾸고 명분을 세워 단합된 한목소리를 내어 내줄 것을 만들지 못하면 손님을 끌기 어렵다. 잔치 상에 먹을 것이 많아야 손님이 온다. 먹을 게 없어 하나 둘 떠나 이렇게 잔치는 끝났다. 이렇게 서른 잔치는 끝났다.